카를로스 알카라스의 올 시즌 시작은 그야말로 극적이었다. 호주 멜버른 로드 레이버 아레나에서 열린 호주오픈 준결승전은 아직도 테니스 팬들의 뇌리에 깊게 박혀 있다. 알렉산더 츠베레프를 상대로 무려 5시간 27분이라는 대회 사상 최장 시간 준결승 혈투 끝에 3-2(6:4, 7:6<7-5>, 6:7<3-7>, 6:7<4-7>, 7:5) 신승을 거뒀다.
승리로 가는 길은 험난했다. 3세트 도중 찾아온 오른쪽 허벅지 경련은 치명적인 변수였다. 평균 시속 204km에 달하던 첫 서브 속도는 177km로 뚝 떨어졌고, 다리 추진력 역시 초당 2.31m에서 1.46m로 눈에 띄게 저하됐다. 5세트 게임 스코어 3-5, 패배 직전의 벼랑 끝에 몰렸음에도 그는 초인적인 집중력을 발휘했다. 내리 4게임을 따내며 결승행 티켓을 거머쥔 직후 코트에 그대로 드러누운 그의 모습은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당시 그는 체력적 한계를 어떻게 이겨냈냐는 질문에 스스로를 끊임없이 믿었다고 털어놓았다. 3세트 중반이 체력적으로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 중 하나였지만,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대처법을 알고 있었기에 마지막 공까지 온 힘을 다해 싸웠다는 것이다.
‘호주오픈의 왕’ 조코비치와의 역사적 만남, 그리고 이룩한 대기업
기적처럼 올라간 결승 무대에는 호주오픈 결승 승률 100%(10전 10승)를 자랑하는 노바크 조코비치가 버티고 있었다. 38세의 노장 조코비치 역시 4강에서 세계 2위 얀니크 신네르를 상대로 4시간 9분의 접전(3-2 승)을 치르며 관록을 증명한 상태였다. 앞서 16강과 8강에서 상대방의 연이은 기권으로 체력을 비축했던 조코비치는 남녀 역대 최다인 25번째 메이저 대회 우승을 정조준하고 있었다.
반면 2003년생 알카라스는 이 결승전 승리 한 번이면 오픈 시대 이후 최연소 커리어 그랜드슬램이라는 금자탑을 쌓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는 이미 프랑스오픈(2024년, 2025년), 윔블던(2023년, 2024년), US오픈(2022년, 2025년) 타이틀을 보유하고 있었고, 치열한 승부 끝에 결국 시즌 첫 메이저 대회인 호주오픈 정상에 오르며 새로운 역사를 썼다.
뼈아픈 오판, 바르셀로나에서 닥친 최악의 위기
찬란했던 호주오픈의 환희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세계 랭킹 1위 자리에서 내려온 알카라스는 얀니크 신네르와의 올 시즌 첫 맞대결에서도 패배하며 흔들리기 시작했다. 분위기 반전이 절실했던 그는 곧바로 모국 스페인에서 열리는 바르셀로나 오픈 출전을 강행했다.
이는 결국 돌이킬 수 없는 화근이 되었다. 오토 비르타넨과의 1회전 경기 도중, 포핸드를 칠 때마다 팔뚝에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진다며 메디컬 타임아웃을 요청한 것이다. 22세의 어린 챔피언은 특유의 끈기로 경기를 스트레이트 세트 승리로 장식하긴 했지만, 데미지는 이미 걷잡을 수 없는 상태였다.
반복된 역사, 클레이 코트 시즌 전체가 흔들리다
알카라스는 2회전을 앞두고 돌연 대회 기권을 선언했다. 아침 검사 결과를 보니 예상했던 것보다 부상 상태가 훨씬 심각하며, 위험을 감수하지 않기 위해 잠시 물러나 있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애초에 바르셀로나 대회에 출전한 것 자체가 가장 큰 리스크였음을 감안하면, ‘위험을 피하겠다’는 그의 발언은 꽤나 역설적이다.
더욱 안타까운 점은 그가 과거의 뼈아픈 경험에서 교훈을 얻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2025년에도 몬테카를로에서 바르셀로나로 무리하게 일정을 소화하다 부상을 입었고, 그 여파로 홀게르 루네와의 결승전에서 패배한 데 이어 마드리드 오픈까지 기권하며 롤랑 가로스 준비에 큰 차질을 빚은 바 있다.
호주오픈 제패 이후 클레이 코트에서도 곧바로 결승에 오르며 쾌조의 흐름을 타는 듯했던 알카라스의 2026시즌은 이제 거대한 암초를 만났다. 당장 마드리드 오픈을 앞두고 온전한 휴식을 취했어야 할 시기에 불필요한 출전을 감행한 대가는 가혹하다. 그는 이제 남은 클레이 코트 일정 전체를 위협받는 뜻밖의 시간과의 싸움을 벌여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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