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12월 2025

체스의 저변 확대: 도하의 여제들과 모바일 게임의 새로운 도전

FIDE의 노력과 여성 체스의 현주소

최근 몇 년간 세계체스연맹(FIDE)은 여성 체스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공격적인 행보를 보여왔다. 2022년을 ‘여성 체스의 해’로 선포한 연맹은 소녀들과 코치, 관계자들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지원했고, 주요 보직에 여성 할당제를 도입하기도 했다. 여성 체스 위원회는 전 세계적으로 체스에 대한 여성들의 관심이 급증하고 있다고 자평하며, 체스를 여성들에게 ‘사랑받고 접근하기 쉬운’ 게임으로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히고 있다.

그러나 체스계 일각에서는 여전히 갈 길이 멀다는 지적이 나온다. 2024년 발표된 성별과 체스에 관한 연구 논문에 따르면, FIDE 회원 중 여성의 비율은 약 11%에 불과하다. 하지만 변화의 조짐은 뚜렷하다. 다가오는 제45회 부다페스트 올림피아드를 앞두고 FIDE의 지원 프로젝트 덕분에 9개 국가가 사상 처음으로 여성 팀을 구성했다. 또한, 어린 자녀를 둔 선수들이 긴 대회 기간 동안 아이와 떨어져 지내지 않도록 보호자를 동반할 수 있는 지원책이 마련된 점도 고무적이다.

도하를 뜨겁게 달구는 챔피언과 도전자들

이러한 변화의 흐름 속에서 카타르 도하에서는 세계 최정상급 여성 체스 기사들이 왕좌를 놓고 치열한 경쟁을 펼치고 있다. 이번 대회에서 단연 돋보이는 인물은 톱 시드를 배정받은 현 챔피언 주원쥔(Ju Wenjun)이다. 래피드 레이팅 2530점을 기록 중인 그녀는 모든 선수가 넘어서야 할 기준점과도 같다. 주원쥔은 지난 4월 상하이와 충칭에서 열린 매치에서 탄중이(Tan Zhongyi)를 6.5 대 2.5로 꺾고 세계 챔피언 타이틀 5회 방어에 성공했다. 이미 뉴욕에서 열린 월드 래피드 및 블리츠 대회에서도 압도적인 기량을 뽐낸 그녀는 클래식뿐만 아니라 모든 시간 제한 방식에서 침착함과 정교함을 유지하는 무결점의 ‘올라운더’다.

주원쥔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인 탄중이는 10년 가까이 그녀와 경쟁 구도를 형성해 왔다. 전 세계 챔피언이자 2번 시드인 탄중이는 2024 여성 도전자 결정전에서 압도적인 성적으로 우승하며 다시 한번 타이틀 매치 자격을 획득했었다. 비록 2025년 타이틀전에서는 주원쥔의 벽을 넘지 못했지만, 그녀는 불리한 포지션에서도 끈질기게 버티며 기회를 노리는 실전적인 승부사다. 래피드나 블리츠 같은 속기 대국에서 그녀의 이러한 생존 능력은 날카로운 오프닝 준비만큼이나 강력한 무기가 된다.

차세대 강자들의 추격

알렉산드라 고랴치키나(Aleksandra Goryachkina) 역시 주목해야 할 강자다. 레이팅 2505점의 그녀는 여성 대회뿐만 아니라 오픈 대회에도 자주 참가하는 실력파다. 2024년 타타 스틸 체스 인디아 래피드 대회에서 무패 우승을 차지했고, 쉼켄트와 모나코에서 열린 FIDE 여성 그랑프리에서도 연달아 정상에 올랐다. 이러한 성과로 그랑프리 종합 2위를 기록하며 차기 도전자 결정전 진출권을 확보했다. 카메라 앞에 서는 것을 수줍어하지만, 체스판 위에서는 탁월한 포지션 이해도와 엔드게임 테크닉으로 묵직한 존재감을 과시한다.

여기에 지난 2023년 세계 챔피언 타이틀 매치에서 아깝게 패배했던 레이 팅지에(Lei Tingjie)도 빼놓을 수 없다. 뉴욕 월드 블리츠 챔피언십 결승에서 주원쥔과 서든데스까지 가는 접전을 펼쳤던 그녀는 구체적이고 현대적인 체스를 구사한다. 비록 2025년 월드컵 준결승에서 탈락했지만, 그녀는 언제든 정상을 노릴 수 있는 저력을 가진 선수임을 다시 한번 증명했다.

체스의 대중화를 꿈꾸는 스타트업의 등장

프로 무대에서 최정상급 선수들이 치열한 두뇌 싸움을 벌이는 동안, 게임 산업계에서는 체스를 대중적인 모바일 게임으로 재해석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최근 ‘조 스튜디오(Zoe Studios)’는 현대적인 캐주얼 유저들을 타깃으로 한 새로운 모바일 체스 게임 개발을 위해 엔젤 투자를 유치했다. 이번 투자 라운드에는 존 라이트, 필 맨셀, 딜페시 파머 등 유수의 투자자들이 참여했으며, 플레이티카(Playtika) 출신의 다니엘 첸(Danielle Chen) 대표와 이타이 마쉬드(Itay Mashid) CPO가 이끄는 14명의 팀이 개발을 주도하고 있다.

조 스튜디오의 목표는 명확하다. 체스가 가진 ‘어렵다’는 진입 장벽을 허물고 누구나 쉽게 즐길 수 있는 ‘캐주얼 체스의 미래’를 만드는 것이다. 첸 대표는 이번 투자 유치가 단순한 자금 확보를 넘어 비전을 공유할 수 있는 ‘스마트 머니’를 확보한 데 의의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녀는 체스가 단순한 전략 게임을 넘어 유저들에게 소속감을 주고 일상의 습관이 될 수 있도록 감성적인 접근을 시도하겠다고 밝혔다.

기존 플랫폼과의 차별화 전략

현재 모바일 체스 시장은 ‘체스닷컴(Chess.com)’과 최근 체스 교육에 뛰어든 ‘듀오링고(Duolingo)’ 등 거대 플랫폼들이 장악하고 있다. 하지만 조 스튜디오의 마쉬드 CPO는 자신감을 내비쳤다. 그는 5살 때부터 체스를 시작해 국가 챔피언들을 코칭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기존 시장에 없던 차별화된 제품을 선보이겠다고 공언했다.

특히 마쉬드는 기존 대형 업체들이 구독 모델이나 광고 수익에 의존하는 것과 달리, 조 스튜디오는 앱 내 결제(In-app purchases) 시스템을 과감하게 도입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는 플레이티카에서 쌓은 수익화 노하우를 바탕으로 한 전략으로, 리스크를 감수하더라도 유저에게 확실한 가치를 제공하겠다는 스타트업 특유의 도전 정신이 엿보인다.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플레이되는 상위 25개 게임 진입을 목표로 하는 이들의 행보가, 도하에서 펼쳐지는 프로들의 열정만큼이나 체스계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을지 주목된다.